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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콤플렉스

 빈한한 선비가 있었다. 동문수학한 벗들은 다들 과거에 급제하고 제 할 일을 찾아 떠났는데 이 사람은 책 보따리를 싸들고 오늘은 이 서당으로 내일은 저 학원으로 옮겨 다니며 과거 시험 준비한다는 폼만 잡고 다녔다.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던 아내가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과거급제 아니해도 좋으니 농사일이나 좀 거들라며 고향으로 불렀다.

 집에 돌아 온 선비는 농사일을 돕기는커녕 거의 매일 바깥으로만 나돌았다. 오늘은 한양에서 김 판서가 왔는데 나를 좀 보자고 한다. 내일은 커다란 물산객주사업을 하는 박 사장이 의논할 게 있다며 나를 초대하였다. 또 그 다음날은 권문세도가인 이대감이 내게 자문을 구한다며 집을 나가서는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취해서 돌아 왔다. 훌륭한 친구들과 사귀는 줄 안 아내는 남편이 밖에 나가서 기죽지 않도록, 없는 형편에 빚을 내어서 의복을 단정하게 맞춰서 입혀주고 주머니에는 용돈까지 넉넉하게 넣어 주었다.

 술에 취해 돌아오면 선비는 아내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내가 일찍 오려는데, 아, 그 김 판서가 내 도움으로 힘든 문제가 잘 해결 되어 고맙다며 으리으리한 별장에다 주안상을 차려 놓고 붙잡는 바람에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지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리되었다. 당신도 한번 초대한다고 하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 여보 내가 그 물산객주 박 사장 사업에 큰 도움을 주고 왔으니까 머지않아 그 친구가 내게도 납품할 수 있는 일을 줄 거야. 우리도 이제 농사일 치우고 장사나 한번 해보면 어떨까?" "여보 세도가 이 대감이 곧 벼슬 한자리 마련해 준다는데 조금만 기다려봐. 그까짓 현령자리 하나쯤은 금방 내려 올 거야"

 양식이 떨어져 멀건 죽 한 그릇을 나눠먹고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선비의 아내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냥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밖으로 출타 했다. 아내가 그의 뒤를 미행했다. 남편의 발걸음은 이 대감 댁 상가로 가고 있었다. 그 다음 날은 박 사장 여식 잔치 집으로, 그 다음 날은 김 판서 댁에서 모친 회갑연을 한다고 소 잡는 일을 마름들과 같이 거들고 있었다. 선비는 날이면 날마다 그런 곳에 가서 허드렛일이나 거들다가 거기서 술을 얻어 마시고 취하여 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 온 아내는 비녀를 풀고 자신의 칠흑 같은 머리를 가위로 잘라 새하얀 한지에다 포장하고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술에 전 남편이 홍 대감에게서 대접 받은 이야기를 늘어놓자 아내가 머리에 쓴 수건을 풀었다. 놀란 선비는 말을 멈추고 아내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비의 아내는 자신의 머리채를 팔아서 다시 공부하되 급제하지 못하거든 집에 들어오지 말라며 남편을 먼 곳의 절로 보냈다. 그날 개과천선한 선비는 죽기 살기로 공부하여 급제는 물론이고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고을 현령이 되었다.

 나는 젊은 시절 이 이야기를 읽고서 실력도 없으면서 남의 이름이나 팔아서 사는 인간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하루가 아무 소득 없는 일에 그렇게 바쁜 것은 내면에 누군가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인물로 보이고 싶은 거짓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거짓된 마음 때문에 출세한 사람들의 일이라면 부르지도 않는 일에까지 나서서 스스로가 바쁘게 뛰어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구도 그를 귀한 인물로는 대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건 마약과도 같아서 하루라도 나돌아 다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못 견디도록 만든다. 이 약에 한번 중독되면 자기 이름이 아닌 남의 이름을 들먹이며 쉼 없이 자신도 그들만큼 중요한 인물임을 강조한다. 자기 집에는 끼닛거리도 없으면서―.

 한 달에 열 곳이 넘는 계모임을 하는 분이 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계를 만든다. 그의 전화는 그 많은 계원들의 모임주선과 관혼상제의 일로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그런 비용으로 허비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니 단 하루도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이 없고 작은 약속은 쉽게 까먹고 지키지 않는다. 나는 그가 일은 언제하고 살림은 또 무슨 돈으로 하는지 늘 의아하였다. 그는 계모임의 부인들 생일까지 기억했다가 꽃을 보낸다. 꽃을 받은 여인들은 죄다 그를 가리켜 매너가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한다.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게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길로 묻는다.

        
"이런 남편과 사시니 얼마나 행복하시겠어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아내는 서글픈 웃음을 짓는다. 겉과 속이 다른 세상에 사는 여자의 고통을 너희가 어찌 알겠는가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중요한 인물로 각인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과시하는 심리, 그리고 그걸 잘하는 짓이라고 강변하는 심리, 나는 이걸 아내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아내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에게 잔소리를 하면 성정이 사나운 사람은 구타, 살림살이 파괴 같은 가정폭력을 행사한다. 어떻게 하던지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때문이다. 어리석은 선비는 현명하고 강단 있는 아내 덕에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아내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것이다. 내가 나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모습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