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니 회한스런 지난 날들이 떠오릅니다. 법정스님은 '우리들 불행 중 어떤 것은 이미 지나거버린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데서 옵니다. 지나간 기억에 얽혀들거나 매달리면 현재의 삶이 소멸되고 맙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번뇌 망상에 잠 못 이루기 일쑤인 중생은 지나간 과거의 기억에서 사무치는 그리움과 회한을 느낍니다. 그것은 별빛이 될 수 있을까요? 4년 전 돌아가신 20회 박상훈 선배에게 후배로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 작년엔가 써놓았던 추모의 글을 외람되이 올립니다. 대동면옥 물냉면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김희근(전 영남일보 문화부장) 2006년이 저물어 가던 12월 어느 일요일 아침, 휴대전화 벨 소리에 잠이 깼다. 고교 1년 선배인 홍성백 시인이었다. 형은 다급한 목소리로 박상훈 형의 임종을 전했다. 잠이 덜 깨 꿈인가 싶기도 했다. 오래 가지 못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급하게 가시다니! 며칠 전 동산병원 입원실로 형이 평소 좋아하던 두유를 사들고 찾아갔을 때만 해도 “막걸리나 한 통 사오지 뭘 이런 걸 들고 오냐”며 면박을 주던 형이었는데…. 그러고선 퇴원하거든 대동면옥 가서 수육에 소주 한 잔 하자고 하시더니! 이북 출신 홀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냉면을 무지 좋아한다던 형은 그 해 여름 내가 소개한 계산동 대동면옥의 물냉면이 자신의 입맛에 딱 맞는다며 즐겨 드시곤 했다.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동산병원으로 갔다. 중환자실로 뛰어올라가 형을 만났다. 손을 잡았더니 아직도 체온이 남아 따듯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가 멈추었던 듯 입을 반쯤 벌린 채 형은 거짓말처럼 누워 있었다. 그것도 6척 장신에 침대가 짧은 듯 구부정하게…. 형의 채 다물지 못한 입을 보면서 문득 서산대사의 ‘임종게(臨終(덧말:임종)揭)’를 떠올렸다. ‘살아 있는 게 무엇인가 /숨 한 번 들이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 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든가 /그러다 어느 한순간 들이 마신 숨 다시 내뱉지 못 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형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가을 영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문학 담당 기자로부터 출판사를 하는 형이 대포 한 잔 하잔다는 연락을 받고 대명동 한 술집에 갔더니 다짜고짜 “김 부장 한테는 내 고마 말 놓겠다”고 했다. 고교 5년 선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그러시라고 했지만 형의 그 저돌성이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교 때 은사이자 선배인 도광의 선생님을 비롯해 시인 몇 분이 참석했던 그 자리서 나는 꼼짝 못하고 최연소자로서 고개를 조아려야 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듣던 대로 형은 말술이었다.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도 술이라면 남에게 지지 않는다는 치기어린 자부심이 있었던 터였다. 누가 부러 붙여 주지 않았는데도 ‘술통’이라는 별명이 대학시절, 또 군대와 직장에서도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그랬는데 술통이 나보다 훨씬 더 큰 형에게는 도무지 당할 도리가 없어 두 손을 들고 말았고, 우리는 곧장 술로 맺어지는 사내들 간의 묘한 동지의식을 나누게 됐다. 그 시절 형은 적자투성이 출판사를 운영하면서도 수입이 좀 생길만 하면 나를 불러냈고, 술자리에는 으레 도광의 시인과 소설 쓰는 이수남 선생 등 문인들이 불콰해진 얼굴로 시론(詩論)을 다투곤 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내겐 특히 그랬다. IMF환란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1998년 4월, 대한민국의 모든 월급쟁이들이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떨었던 시절, 나도 예외 없이 해직 대신 무급휴직이라는 날벼락을 맞았고, 신문사가 법정관리와 인수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2005년 4월, 20년 넘게 해온 신문기자 생활을 접어야 했다. 누구보다 내 해직을 아쉬워하며 잦은 술자리를 마련해 주던 형은 어느 날, 출판사에 놀기 삼아 나오기를 권유했다. 오갈 데 없었던 나는 지하철을 갈아타 가며 대명동 남부시장 골목길 2층에 있던 형의 출판사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일거리는 거의 없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시집 몇 권, 정년퇴직을 앞둔 교장선생님들의 수필집 몇 편이 일감의 전부였다. 출판사에 쭈그리고 앉아 얼마 안 되는 분량의 원고를 교정보다가 해 질 무렵이면 남부시장 대폿집에서 막걸리 추렴으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술자리에서 형은 늘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청구주택 홍보차장 시절을 이야기했다. 회사 홍보지에 투고하는 대구문인들에게 후한 원고료를 지급했던 일, 문인들과 술집을 전전하며 원 없이 ‘카드를 긁었던’ 일화들을 형은 자랑삼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형과 함께 생활하면서 몇 가지 남다른 형의 장․단점들을 보게 됐다. 무엇보다 형은 돈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 나도 어지간히 돈과는 인연이 없고, 그런저런 이유로 돈을 모은다든가, 재테크를 한다든가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형의 경우는 심했다. 몇 푼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빌려 쓰거나 외상으로 하고, 나중에는 빌려 쓴 일조차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집에도 생활비를 거의 갖다 주지 않아, 형수님은 야채즙을 가정에 배달하는 일로 살림을 꾸려 나갔다. 지방선거가 있었던 2006년 봄, 출판사 운영난을 조금이라도 덜어보자는 차원에서 선거 출마자들의 홍보물을 수주키로 했다. 후배 채원태가 쫓아다니면서 기초의원 출마자 몇 명의 일감을 끌어와 어찌됐든 3천여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형은 “내 몫은 얼마고, 니 몫은 얼만데 지금 통장에는 4만원 밖에 없데이…”하며 미안해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처음엔 따지고 들기도 했지만 곧 이런 시시비비가 형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6척 거구에 범털 같은 인상의 형이지만 마음은 때론 소녀처럼 여렸다. 한번은 형의 오랜 친구 강삼수 형이 끌고 간 미8군 후문의 한 클럽에서 곱상한 필리핀 처녀를 만나더니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몰래 혼자서도 몇 번 그 처녀를 찾아 갔던 모양이다. 형수님에게는 안됐지만 그게 형 생전의 마지막 로맨스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형 일생의 여자는 고교 시절에 만난 연상의 여인인 형수 한 분 뿐이었음을 장담한다. 형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 그동안 써왔던 단편소설을 완성했다며 원고를 내게 보여 주었다. 기실 그때까지 내가 읽은 형의 단편소설은 문학에 문외한인 내게도 좀 미진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시종일관 거친 문장과 경상도 사투리의 대화체로 이어지는 단편들은, 고교시절 천재적 소질을 보였다는 형의 문학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먹고살기에 바빠 소홀했던 문학수업과 그 시절 세상을 바라보는 형의 삐딱한 시선 탓인지 완성도가 떨어져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이 되고만 형의 단편 ‘홍도야 울지 마라’는 그때까지 형의 작품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확 바꿔 놓았다. 내가 원고를 다 읽고 형에게 외람되게 던진 촌평은 ‘신춘문예 당선감’이었다. 지나고 보니 형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스스로는 중견작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후배란 놈이 신춘문예 운운 했으니 말이다. 한국전쟁 직전 월남해 대구에 정착, 온갖 풍랑을 겪은 형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소설이었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소설의 결말을 보면 당시 형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지인들의 후일담이었다. 일간지 문화부장을 지낸 내 어쭙잖은 소견으로도 형이 괜찮은 여건에서 문학 공부에 매진했더라면 만만찮은 필명을 날렸을 것으로 믿는다. 형은 그 해 여름 마지막 작품을 탈고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도 며칠 씩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병원 가서 종합검진 받아보라고 하면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했다. 마지못해 병원에 갔다 오더니 모처럼 환해진 얼굴로 의사가 과민성대장염 증세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러더니 얼마 못 가 동산병원에서 담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쯤 형은 그 당당했던 풍채는 어디 가고, 겨울 나뭇가지처럼 말라 허깨비 같았다. 그런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었을까, 형은 암 선고를 받은 지 한 달이 채 안 돼 눈을 감고 말았다. 형은 그를 아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남기고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 그래서 때때로 형이 그립다. 벌써 형이 돌아가신 지도 4년이 가깝다. 세월은 참 빠르다.